일본의 마리아 신심
일본의 마리아 신심
역사
일본의 성모신심의 흔적은 키리시탄 순교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성모신심은 16세기 일본에 진출한 선교사들에게서 비롯되었다. 본국에 선교 결과를 보고하는 1592년 ‘예수회 연보’에서는 가톨릭 신심단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 가운데 ‘싼타 마리아회’, ‘성모 영보회’ 등의 성모신심과 관련된 단체들이 있었다. 도미니코회에서 조직한 ‘로사리오회’는 특히 규수 지방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신심단체였다. ‘로사리오회’는 높고 낮음의 차별 없이 만민을 사랑하는 동정 마리아에 대한 봉사와 속죄를 강조하였다. 조선인 키리시탄들도 ‘로사리오회’에 많이 입회하였다.
성모 발현 - 아키타의 성모
아키타의 성모(秋田の聖母マリア)는 1973년에 일본 아키타 인근 외딴 지역인 유자와다이에서 카츠코 사사가와 아녜스 수녀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을 말한다. 아키타에 발현한 성모님의 메시지는 기도와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성모님은 사사가와 수녀에게 발현하시어 “묵주 기도를 많이 해다오. 절박한 재난으로부터 구조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내게 다가와 의지하는 사람은 구조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해진다.
사사가와 아녜스 수녀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1973년 6월 28일 그녀의 손바닥에 열십자로 교차된 성흔이 나타난 데 이어 성체봉사회 수녀원 경당에 모셔 놓은 성모상의 손바닥에도 성흔이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1975년 1월 4일부터 1981년 9월 15일까지 모두 101번 성모상이 계속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성모상의 성흔은 눈물이 흐르기 전에 나타났다가, 눈물이 흐른 후에는 사라졌다고 한다. 발현 이후 많은 순례객과 신심 단체들의 발길이 이어져 오고 있다.
한편 1988년 4월 22일 니가타 교구장 이토 쇼우지로(요한) 주교는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에게 서신을 통해 아키타의 성모 발현 소식을 전하였으며, 라칭거 추기경은 아키타의 성모 신심을 신자들에게 전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1990년 4월 주일 교황 대사 윌리엄 애퀸 커루는 이탈리아의 한 가톨릭 잡지(30 Days)와의 인터뷰에서 라칭거 추기경은 성모의 메시지의 신뢰성이나 진정성에 대해 어떠한 유권적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1984년 4월 22일 이토 주교는 사목 서한을 통해 아키타의 성모 발현이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교황청으로부터 최후 판정이 내릴 때까지는 자신의 교구 내에서 아키타의 성모에 대해 공경을 표하는 것을 금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다.
참고문헌
박양자, 일본 키리시탄 순교사와 조선인, 순교의 맥, 2001.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82%A4%ED%83%80%EC%9D%98_%EC%84%B1%EB%AA%A8 (12월 27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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