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의 역사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
역사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는 1921년 9월 7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프랭크 더프((Frank Duff, 1889~1980)에 의해 창시되었다. 당시 국가와 교회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었는데, 신자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비호의적인 정치 성향에 대항하며, 평신도 운동(가톨릭 액션)을 전개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레지오 마리애도 창설되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고자 하였다. 1914년 통과된 자치법안이 1차 세계대전(1914-1917)으로 무효가 되자 아일랜드 사람들은 1919년부터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고, 1921년 독립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당시 아일랜드는 전쟁과 이민으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는 공무원으로 국가 재건에 힘쓰면서도, 신앙인으로서 빈첸시오회 1와 예수 성심 단주회에 가입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여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성모신심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루도비코 성인의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을 주위 사람들과 함께 읽고 공부하는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프랭크 더프는 기존 빈첸시오회와 달리 여성들과도 함께 활동하던 파트리치안회의 단장이 되었다. 어느 날 빈첸시오 평의회에서 남자회원들의 병원 방문에 대한 활동 보고에 감명을 받은 여성들이 부인 병동 방문은 여자들이 담당할 것을 제안하였다. 1921년 9월 7일 레지오의 첫 회합 결과, 참석자들은 프랭크 외에는 남성을 입단시키지 않으며 빈첸시오회의 고유 활동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영적인 활동만을 하기로 결정 하였다. 이후 레지오 마리애는 여러 쉼터를 운영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일부 사제들은 평신도인 프랭크 더프를 사제의 임무를 대신하려는 사람이며 반교권주의자라는 비난을 하였고, 레지오의 확산을 방해하지만 레지오 마리애는 이후 비오 11세 교황의 인정과 격려를 받았고, 프랭크 더프 또한 평신도 참관인으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가하였다.
레지오 마리애는 193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개최된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전 세계에 알려지고 확산되었다. 많은 사목자들이 레지오 마리애의 효과적 활동을 경험하면서 레지오를 적극적으로 도입였고, 프랭크 더프 역시 레지오 선교사들을 양성하여 전 세계에 파견하였다. 대표적인 선교사로는 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에델 퀸(Edel Quinn 1907~1944)과 남미에서 활동한 알폰소 렘(Alfie Lambe, 1932~1959)을 들 수 있다. 2018년 현재 레지오는 전세계 170여개 나라에서 활동 중이다.
참고문헌
장 콩비, 『세계 교회사 여행』, 노성기·이종혁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2.
테런스 딕스, 『주머니 속의 유럽사』 전일휘 옮김, 가람기획, 2006.
로버트 브래드쇼, 『프랭크 더프의 생애』, 안상인 옮김, 성요셉출판사, 1989.
최경용. 『레지오 마리애 영성-개정판』, 바오로딸, 2004.
-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하고자 1833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프레드릭 오자남(Frederic Ozanam)신부에 의해 만들어진 평신도 사도직 단체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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